밤에 익숙해지며 Acquainted with the Night
2011.9.20_10.15

Acquainted with the Night 
밤에 익숙해지며 

by 장보윤 

 

 

 

 

 

전시개요
사람이나 사물이 떠나있는 빈 곳에서 그것들에 남아있는 기억과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해 온 장보윤의 개인전이 9월 20일부터10월 15일까지 26일간 갤러리팩토리에서 열린다.
사진은 본래 영원한 하나의 죽음을 일깨우는 일과 함께 장구한 것과 영혼에 관련된 것을 담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어느 사진이 시선을 잡아 끈다거나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유를 간단히 쉽게 설명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내용과의 어느 화합에 관련된 것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비극에 몸을 담는 것일 텐데 장보윤의 이번 작업 또한 이 같은 사태에 놓여있으며, 같은 죽음이라 한다면 그것을 사랑 이라거나 존재 와 같은 단어로 바꾸려고 원한다.

 

두 개의 밤과 한 예민한 중간자의 기록 
글_박세연 

잘 때조차도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으므로, 생애 이래로 한 번도 끊이지 않은 의식이 미해결 상태의 문제들로 인해 점차로 무게와 의무가 과중해져 마침내 심각한 불안이나 신경증 상태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현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좋게 말할 때 엄밀하거나 지극히 충실한 성품의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소위 병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러한 증상이 마땅한 제어를 위해 손쓰지 못하고 만성화되었을 때 환자는 끝내 종종 자살적 욕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죽음을 바라는 마음은 의식을 종료하고자하는 소망과도 물론 관련이 있겠지만, 오히려 살아가는데 있어서 구체적으로 죽음을 바라지만 죽을 수 없는 절망적 상태가 되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 한 사상가가 절망에 관한 그의 통찰적인 에세이로부터 ‘절망자는 육체가 병으로 죽는 것과 같은 의미로 죽을 수는 없는데 절망으로 인한 죽음은 끊임없이 생으로 전화(轉化)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과 투쟁하는 절망은 곧 삶이요, 이는 절망을 하든 거기서 벗어난 것으로 느끼든 실제로 죽든 살든 사람이 영원함에 관한 것과 조금의 관련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현재 번민하고 있는 이가 그러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신호가 언제나 전적으로 명백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이 계속해서 뒤채는 가운데 의연한 생활인으로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신경증을 가라앉히고 불안을 체념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음으로 가까이 데려가는 것도 불안이요 다시 삶으로 전환해오게끔 만드는 것도 불안이다.(물론 누구에게도 영혼이 전적으로 상실되었다고 얘기할 순 없겠지만 대개는 이러한 끈기를 가져보기 전에 시선을 이내 다른 안전한 곳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씨앗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는 어디에나 산재해있으므로 불안이 내적인 방향을 향해 자신을 바라보고 행동하게끔 겨우 부추긴다면 그것을 더욱 충동질하고 일정한 방식으로 지속케 하는 것은 강박증과 두려움이다. 누가 이것을 누구 하나에게 너만 건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새로운 하나의 예를 본다면, 한 작가는 어느 낯선 이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사진 속의 장소나 사람을 찾아서 멀리까지 떠난다. 사진들은 자연발생적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구체적으로 어느 죽음에 관한 내용들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 사실과 상관없이) 여행자는 결정적으로 여행의 내내 그 내용들이 존재하고 있는 방식이 죽음에 관한 색채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본래 사진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는 특징은 비극적인 것과 유토피아적인 것을 동시에 알려준다는 것인데, 비극적인 것은 일종의 죽음에 관한 확인이며 유토피아적인 것은 상상적 경험과 그것에의 염원에 관한 것이다.

물론 감정이입이 자연발생적이라는 바에 대해서도 보다 냉정하게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이 여행자는 실제로 그러한 고민에 빠져들었음을 진술하는데 사르트르가 모험에 관하여 언급한 투사의 방식을 떠올린다. 즉 그것은 시간의 불가역성을 모험의 느낌이라고 판단하여 가령 모험은 흥미로운 것이라거나 어떤 경험이 모험이라고 여기는 식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흄이 인과관계를 정당화 하는 방식이었던 관념연합의 원리와 유사점이 있다. 다시 말해 보편성의 원리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반복적인 경험에 의해 허구화된 기대나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가 가능하다면 사진의 내용을 추적하고 탐색하는 여행자의 긴장을 하나의 투사 과정들로 이루어져있다고 적용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그의 긴장이 불러들여지는 방식이었다가도, 일관된 내용의 예시들이 제거된다면 애초에 언제든지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만약 심리학적 긴장해소의 차원으로서 그러한 착각을 용인한다 할지라도 사진에 관한 경험은 무엇보다도, 엄밀하게 죽음 자체와 연관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그 같은 판단들을 넘어선다. 사진은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에 대해서 그의 의지나 감정이입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진 자체의 비의지적인 속성으로써 죽음의 경험에 관한 감정이입을 추구하고 있다. 마치 모든 이의 과거라든가 기억이라는 것들이 그런 것처럼 사진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일에는 흔히 느끼기에 직접적인 것이 결여돼있는데, 그것이 지시하는 것들은 이미 생겨났을 때부터 거기에 존재하지를 않는 것이다. 사진이 나타내는 내용은 인스턴트 적으로 그 안에 속임수같이 머물러 있을 뿐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가령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느껴보려고 시도하거나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같은 실망감에 대해, 일찍이 사진의 슬픔에 관해 고찰한 롤랑 바르트는 알아볼 수 있되 되찾을 수는 없었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답 없음을 응시하는 것은 절망적 상태와의 또 다른 대결로, 그것의 판명된 결론은 ‘죽음’이로되 죽어지지 않는 영원한 죽음에 관한 경험이다. 사진은 그것을 찍고 찍히는 이의 순간에 머물러있으며 인화된 종이 안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이의 사유공간에 펼쳐지고 상상적으로 확장되지만, 그 근거는 빈약하고 현전하지 않는 것에 머물러져있으므로 되돌아올 곳이 없어 사진의 상태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바로 같은 이유로 사진의 비극은 숭고함을 겪게 하는데, 사진을 바라본다는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는 사태의 무력함과 절망이 신앙적 차원으로서 영원함에 속한 것을 요청해오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정신과 존엄함에 관한 요청이다. 비극의 일부로서, 유토피아적인 것은 어디까지라도 발견되어지지 않고 다만 정당성으로서 요구된다. 하릴없이 어디로도 편입되어 살아가지 못하고 중간 상태에 머물러 서성거리고 있는 자인 작가는 의식을 꺼뜨리지 못하는 가운데, 비극의 자리와 유토피아의 자리에 동시에 서서 매번 같은 요청을 한다. 충실하게 죽음의 경험을 계속해서 반성한다.

 

 

 

 


전시문의
갤러리 팩토리
전화 : 02-733-4883
이메일 : master@factory483.org
웹사이트 : www.factory483.org



Overview
Title : Acquainted with the Night 
Duration : Sep. 20, 2011 - Oct. 15, 2011 
Artist talk : Oct. 8, 2011, 3:00 p.m. 
Hours : Tue.Wed.Fri.Sat. 11:00 a.m. - 6:00 p.m.
(Closed on every 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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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 master@factory483.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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